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요 10조 (문단 편집) === [[불교]]에 관한 무분별한 사치 금지(제1·2·6조) === 훈요 10조 제1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불교)|절]]을 새로 만드는 것이 [[고려]]가 [[신라]] 때보다는 비교적 줄어들긴 했는지,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805011_002|연산군 8년 5월 11일 기사]]를 보면 [[연산군]]이 새로운 사찰 창건은 고려 때가 많았는지 신라 때가 많았는지 물어보는데 이극균은 신라 때가 더 많이 생겼다고 답한 적이 있다. 저게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대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그것도 무려 연산군)의 질문에 일부러 잘못 답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적어도 조선의 사대부들이 알고 있는 정보에 한해서는 불씨를 너무 믿어서 망했다는 고려도 신라보다는 사찰 창건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조의 배경은 신라는 너무 절을 많이 지어 망했다면서 현재까지 세워진 절들은 모두 [[도선]]이 정한 것이므로 함부로 절을 더 짓지 말라는 것.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불교의 지나친 세력 확장을 경계하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고려사 [[최유선]] 열전엔 최유선이 제2조를 언급하며 [[문종(고려)|문종]]에게 [[흥왕사]] 건설을 중단케 하기도 했다. 제6조는 제1조의 불교의 숭상과 맥을 함께 하는 유훈이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모두 불교와 관련된 행사들로, 왕건이 후대의 왕들에게 이러한 대규모 행사를 통해 백성들의 결속력을 높일 것을 권한 것이다. 왕건이 비록 고려를 다스리며 국가의 통치체계로 [[유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당시 대부분의 [[호족(한국사)|호족]]들은 독실한 불교 국가였던 [[신라]]에서 살던 사람들답게 자연스레 [[불자#s-1|불자]]였다. 또한 당연히 대부분 일반 백성들도 불교를 매우 중요하게 받들었다. 불교는 이후 [[조선]]이나 현대 [[대한민국]]에 비교할 수 없이 일반인들의 생활 전반에 깊이 유착된 [[종교]]이자 문화였다. 따라서 국론과 백성들의 결집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교]]를 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만 후손인 [[성종(고려)|성종]] 시절에는 일시적으로 널리 유학을 권장하고 불교 행사인 팔관회나 연등회 등을 폐지시켜 노골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물론 이는 중앙집권화와 관료 체제로 국가의 통치 체계를 다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다고 탄압하는 일은 없었고, 성종 사후에 팔관회와 연등회는 곧 원상복구되었다. 그만큼 불교가 당시 고려에서 중요시되었다는 것이다. [[오항녕]]은 '조선의 힘'에서 훈요 10조의 첫번째 조항이 불교에 대한 언급이며 마지막 조항이 유교에 대한 것임을 들어 유교보다 불교가 우선시되었던 고려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구라고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가 중시되자 그만큼 불교계의 폐단은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상당히 심각해졌고, 훗날 고려를 승계한 조선이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는 제1근거가 되었다. 제6조에서 언급한 행사에 대해 [[성종(고려)|성종]]은 '''이러한 행사는 그냥 돈놀음이다'''라며 깔끔하게 폐지시켜 버리고 일시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는 다다음 [[현종(고려)|현종]] 때에 가서 다시 부활되었다. 이때 현종에게 팔관회 부활을 건의하여 성사시킨 인물이 바로 [[최항(972)|최항]][* [[무신정권]]의 집권자 중 하나인 [[최항]]은 [[고종(고려)|고종]] 시대의 인물이다.]이다. 당시 현종의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팔관회를 부활시킨 인물이기 때문에, 훈요 10조 현종 측근 최항 조작설과 맞물려 최항이 훈요에 어느 정도 손을 대지 않았겠느냐며 의심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팔관회는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다 조선 건국 직후에 폐지됐고, 연등회도 규모가 축소되는 등 난항을 겪었지만, 그래도 연등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사실 고려왕조나 조선왕조, 그리고 지금의 훈요 10조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현재 유교계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는 현재에도 불교의 부패와 권력투쟁이 극심해지니 대체로 이것에 대해서 많은 [[돈지랄|돈×랄]]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고, 반면 불교계의 경우는 옹호론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유교계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는 성종의 불교 개혁과 조선왕조의 불교 개혁을 근거로 비판을 가하고 있으나, 불교계의 경우는 오히려 [[현종(고려)|현종]]·[[문종(고려)|문종]]의 치세는 불교에 있다는 것이고, 또한 [[유교]]와 관련된 행사는 과거의 합격한 뒤 그 합격자들이 시험관을 스승으로 삼고 예의를 표하는 행사도 과거제의 지공거 행사와 다르지 않는 문화라고 한다.[* 그리고 사실 조선왕조의 불교 개혁을 근거로 들자면 그 이유가 된 불교계의 부패를 끄집어내야 하는데 '''조선 후기의 서원의 행패가 고려 시기의 사찰의 부패를 똑 닮고 만다'''. 그나마 사병이 원천차단된 조선이었기에 사병은 없었지만. 괜히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밀어버린 게 아니다. 서로 물고뜯지만 역사적 행보는 그놈이 그놈인 셈.] 반면 2항의 근거를 들며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대체로 고려의 경우는 불교 - 유교 - [[도교]] 3교가 공존했기에 2항과 6항의 내용이 각각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2항과 6항을 조합해 중간점을 찾으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조항을 싫어해서 2항을 따른다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은 이 조항을 따른다. 이는 대체로 [[이차돈]]의 논란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실은 불교계도 유불습합, 즉 유교+불교 사상이 섞인 불자들이나 초기 불교의 시각에선 많이 비판한다. 한편으로는 두 행사가 [[신라]] [[진흥왕]] 때 시작된 행사고, 특히 팔관회는 [[동사강목]]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6A_0150_000_0220_2002_003_XML|918년 팔관회 개최 기록]]에서 그 진행 방식과 행사 내용이 신라의 고사(故事)였다고 되어 있어서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신라의 팔관회를 세세한 부분들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개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당부하는 6번 조항은 앞서 고구려 계승성을 나타낸 5번 조항과 더불어 신라 계승 의지도 함께 나타낸 조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